어머니의 눈썹과 속눈썹은 아직도 새까맣다. 세월이 그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눈썹만은 여전하시다.

어머니는 2020년 8월 27일 성남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어느새 6년을 넘겼다. 2026년 1월 24일 그날, 처음으로 어머니는 알수없는 혼잣말을 하시며, 내 손을 만지시더니 힘주어 꼬옥 잡으셨다. 그 짧은 순간 긴 세월이 물밀듯이 격하게 다가왔다. 말보다 손을 통해 기억이 전해졌을까.
내가 마포 남정국민학교 4학년이던 해, 1973년이다. 어머니는 마포 공덕동 로터리 시장에서 처음으로 가판대 장사를 시작하셨다. 생전 처음 해보는 시장통 장사였다. 하루 종일 시장에서 다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시던 늦은 저녁, 어머니는 풀빵이나 호떡 한 봉지를 들고 오시곤 했다. 종일 힘들게 장사하시고 몇 푼이나 버셨는지.. 자식들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하셨을 어머니..
겨울이면 눈이 무릎까지 빠지던 시절이었다. 마포 로터리에서 산 위 물탱크 아래 집까지, 힘든 몸을 이끌고 올라오시던 어머니를 사남매는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언제나 처럼 어머니를 기다리는 간절함으로 가득했다.
그후 어머니는 삼양동에서도 시장 좌판 장사를 이어가셨다. 삶의 한복판에서 고단하셨을 어머니,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시고 장사를 이어가셨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들게 감당하셨다. 이제 와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앞선다. 그때는 몰랐다.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처절하셨을지.
어머니는 평생 집안의 제사와 시제를 챙기셨다. 작은 제사뿐 아니라 큰집 제사까지 대부분 어머니의 몫이었다. 큰며느리로서, 맏아들 아내로서, 말없이 감당해야 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집안에는 다들 손윗사람들뿐 기댈 곳도 없었을텐데. 속으로 삼킨 눈물이 얼마나 되었을지 생각하면, 이제야 마음이 숙연해진다.
어렸을 적, 제사철이면 어머니는 수없이 많은 제사상을 차리셨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시제와 제사를 다녔다. 우라레부터 함평, 무안까지, 많은 곳을 다녔다. 집안 어르신들은 제사 일을 종손이신 큰집 할아버지께 배운 아버지에게 의지했고, 그 시절에는 수시로 시골에서 서울로 집안일을 의논하러 오신 어르신들과 비좁은 방에서 함께 자기도 했다. 그럴때면 식사부터 수발까지 늘 어머니의 수고가 있었다.
어머니는 해남에서 장성으로 시집오셨다. 황해도 해주 최씨인 어머니와 황해도 평산 유씨인 아버지. 어쩌면 황해도가 두 분을 이어준 인연의 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중매가 흔하던 시절, 가문을 중히 여기던 당시에 맺은 결혼이다. 집안의 결혼 어머니의 삶은 집안의 뒷바라지에서 시작됐다.
열명이 더 되는 시동생과 시누이, 시올케, 친정 동생들 대가족 안에서 큰며느리로 살아낸 그 세월. 그 속에서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내셨을까. 이제 와 뒤늦은 죄송한 마음이 밀려온다.
어머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말없이 묵묵히 감당해온 그 세월들, 잊지 않고 오래도록 간직하겠습니다.
























